하늘과 땅 사이의 끈, 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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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기획홍보분과 작성일22-10-04 08:45 조회81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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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 사이의 끈, 아이콘
아이콘(ICON)이란, 그리스도교에서 공경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성화상을 말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당시의 제국주의적 예술을 무시하였다. 2~3세기 지하 동굴(catacomba)의 목가적이고 만가적인 그림들은 제국주의의 그것과 아주 대조적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후 1세기 동안 그리스도교인들은 유다 전통에 따라 종교적 상(像)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3세기에 와서는 대부분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아이콘을 신앙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데 익숙해 있었다. 4세기말경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은 순교자나 순교자의 일생을 그린 아이콘으로 교회 내부의 벽을 장식하는 것을 장려하였다. 이는 문맹자들로 하여금 “책을 읽지 못하는 바를 벽(壁)에서 읽도록 하는 데”(성 그레고리오) 유용하였고, 새로운 구도자들을 교시하는 데 사용되어 일종의 교육적인 가능을 담당하였다. 한편으로 “잉크와 종이에 의하여 표시된 것이 다른 편에서는 여러 가지 색채와 다른 자료에 힘입어 성상 안에 표시되어 있습니다”(테오도로 스투디테).
5~6세기에 걸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감정과 상통하는 공평을 기한 아이콘에 관한 신학이 형성되었다. 이미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골로 1,15)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본성이 하느님과 가까운 데 비하여 인간은 다만 외모만이 하느님과 가깝다.(이는 곧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이콘이라 말할 수 있다.) 완성된 그림은 원상(原像)의 모사(模寫)이며, 원상에 유사한 점을 고려하면 원상의 한몫을 차지한다는 신플라톤 철학에 의거한 아이콘 사상이 이러한 목판에 그려진 그림들로 다시 전용되었다. 성 바실리오는 “성상에 주어진 영예는 원형(原型)에 도달한다.”고 하였다. 이는 성상의 논쟁이 일었던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상기되었다.
아이콘은 영원성에 뿌리를 둔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영원성의 창문’이라고 부르며, 가시적인 형태로 구체화된 “하늘과 땅 사이의 끈”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아이콘은, 예술로서만이 아니라, 종교와 직결되어 인간의 감각에 호소하는 그림이며 동시에 거룩한 신성을 직관적으로 깨닫고 거기에 동화시키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영원성을 추구하는 종교적 진실이 ‘형상과 색채와 빛’이라는 물질적 매개를 통해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아이콘은 불가시적인 영원한 진리의 빛을 가시적인 형상으로 찬미한 예술로서 이해해야 한다. 아이콘은 인간의 지성의 한계를 초월한 하느님의 세계에 속한 말씀의 기록인 것이다.
성상 논쟁
692년, 트룰누스(Trullo) 교회 회의에서는 그리스도를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하는 것을 규제하였고, 762~842년까지 동방 교회를 진동시킨 ‘성상 파괴 논쟁’은 아이콘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비잔틴의 황제 레오 3세의 강제 방침에 따라 ‘성상 숭배 금지령’이 내렸고 그 논쟁은 100년 이상이나 계속되었다. 성상 찬성론자들은 “문자를 아는 사람에게 책이 해주는 역할을, 문자를 모르는 사람에게 그림은 해줄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정신적인 것으로만 관찰할 수 있고 감각을 통해 관찰할 수 없는 것은 정신적인 관찰도 폐쇄해 버린다.“고 그 의미를 강조하였다.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아이콘에 대해서 하느님을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논쟁이 있었는데 하느님을 그리는 것은 부인되었지만, 그리스도의 묘사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지지자들의 주장이 관철되었다.
이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인간이 되었으므로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성상 찬성론자들은 형상이란 단지 필요한 것일 뿐만 아니라 신성한 것으로 간주된다고 주장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들 인간에게 인간적 모습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려고 결심하셨다면 어째서 가시적인 형상 속에 당신 자신을 드러내려 하시지 않겠는가? 우리는 그 성상을 통해 하느님과 성인들을 공경하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이 시대의 아이콘들과 초기의 아이콘들은 거의 파괴되었고, 아이콘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박해를 당하거나 죽음을 당하였다. 아이콘 화가들은 다른 지역으로 피해 가서 작업을 계속하였다.
논쟁의 근거는 성서와 교회의 전승에 있었다. 그것은 하느님을 묘사해도 좋은가였는데, 찬반론자 모두 하느님을 눈으로 본 적이 없는 사람이 하느님을 그릴 수는 없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인간이 되셨으므로 인간의 모습으로 그릴 수 있다고 합의를 보았다. 843년에 성상 찬성론자들이 승리를 거둔 후 교회는 가능한 한 원상에 가깝게 그리도록 촉구하였고, 이러한 그림들만이 진정한 아이콘으로 간주되었다. ‘성상 논쟁’ 이후 아이콘의 진가는 급속히 회복되어 러시아 동방 교회 아이콘에 와서 절정을 이루었다. 성상 논쟁은 오히려 아이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아이콘이 양식
아이콘은 비잔틴 양식의 가장 특징적인 그림이며, 러시아 미술 가운데 가장 뛰어난 보화라고 말한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전례의 일부에 포함시킬 정도로 신성시하고 흠숭하고 있다. 아이콘은 비잔틴 문화권에 속하는 것인 만큼 성상 화가들은 노련한 솜씨로 묘사하기보다는, 외형과는 거리가 먼 진리를 표현하는 것을 그들의 예술 목표로 삼았다. 인간이 지닌 신성을 그들의 작품에 반영시키는 것을 절대적인 원칙으로 했다. 대부분의 성상화가들은 익명으로 남아 있기를 원해 자기의 존재가 작품보다 2차적인 것임을 보여 주려고 했다. 그래서 성상에 개인의 영향을 배제시켜 성스러운 면만 강조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작품은 비개성적이며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비잔틴 아이콘
유스티아누스 황제로부터 성상 파괴 운동에 이르기까지 비잔틴 미술에 있어서 아이콘은 공사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가정의 평안과 번영을,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도시의 보호를,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을 기원하는 데 직접적으로 사용하였다. 건축이 비잔틴 시대 전반에 걸쳐 발전해 온 반면에, 회화나 조각은 성상 논쟁의 대상이 되어 8세기초부터 9세기 중엽까지 상당한 퇴보를 겪어야 했다. 비잔틴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아이콘은 ‘블라디미르의 성모’인데, 이 아이콘은 12세기초 비잔틴 화가에 의해서 그려졌고 1130년경 러시아 블라디미르로 옮겨져서 1395년 몽고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다시 모스크바로 옮겨졌다. 이 아이콘은 오늘날 우리에게 남겨진 아이콘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다.
러시아 아이콘
아이콘은 정교회의 신앙과 더불어 발칸 반도와 러시아 전지역에 퍼졌고, 1453년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그 생명을 잃지 않았다. 13세기에 러시아는 몽고 침입을 받았고 지배를 받았지만, 문화적으로는 그들보다 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문화 · 종교 면에서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고 결국 오랜 기간의 몽고 지배에서 독립하게 되었다. 러시아 아이콘은 역사적으로 어려웠던 시기를 지내오는 동안 러시아인들에게 희망과 시련 극복의 힘을 주었다.
아이콘의 주제
아이콘은 신자들에게 성서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하여 교리를 설명하려는 의도로 그려졌다. 아이콘 화가들은 자신의 이러한 의무를 신성한 것으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더불어 예술적 상상력을 작품 속에 표현하였다. 아이콘의 주제는 삼위일체 · 그리스도의 초상 · 그리스도의 생애 · 성모 초상 · 성모와 아기 예수 · 성인 성녀 · 12사도 · 순교자들이었다. 15~16세기 이후로 시대의 변천에 따라 아이콘도 점차로 변천하였다. 시편 찬미가에서 인용된 새로운 주제들이 등장하였으며 한 인물의 초상보다 수도원의 창설자의 작품, 또는 수도원 자체에 대한 묘사가 더욱 중시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주제들의 발전은 때때로 이단적인 교리를 방어하는 것과 관련하여 교회가 성상을 통해 참된 신앙을 확보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아이콘 묵상
아이콘을 바라보며 묵상을 하고, 그 앞에 촛불을 밝히고 기도함으로써 사람들은 아이콘이 자신들을 위해서 중재의 힘을 보여 주기를 바랐다. 어떤 아이콘은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작업장에 걸렸고, 압가르가 왕과 관련한 그리스도의 초상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아마포에 당신 얼굴을 찍어 준 것으로 알려져 치료 목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아이콘이 하늘의 힘과 곧장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 힘으로 중재자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부터 기인한 것이다.
아이콘은 전문 미술가나 미학자의 눈보다는 신앙 속에서 마음의 눈으로 묵상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신자는 어제의 신자와 마찬가지로 기도와 영성 생활에 있어서 신비를 표현하려고 시도하고 이를 결코 은폐하지 않는 작품들을 봄으로써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요한 바오로 2세의 사도적 서한 ‘1200주년’에서).
글: 이청계 프란치스꼬(성화상 전문 제작자)
[경향잡지, 1990년 3월호]
가톨릭 굿뉴스에서 재인용 http://pds.catholi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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