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 나는 몇 번이나 용서할 수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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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기획홍보분과 작성일23-10-27 10:29 조회40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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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의 일입니다. 동기 신부님들 모임에 갔다가 갑자기 다급한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지냈던 김 베드로 형제님 집에서 온 병자성사 요청 전화였습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급히 베드로 형제님의 집으로 달려가 병자성사를 주었습니다.
베드로 형제님은 1년 전부터 폐암 말기 환자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1년 전에도 병자성사를 주었는데, 이제는 정말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병자성사를 받고 싶어서 전화를 했던 것입니다.
병자성사 후, 베드로 형제님과 조용히 두어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베드로 형제님은 1년 전 병자성사 때 내가 했던 말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사실 그때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 형제님의 기억에 의하면 나는 1년 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베드로 형제님,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정말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느님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느님과의 만남을 준비하십시오. 그리고 저와 한 가지 약속을 하면 좋겠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혹시 그동안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진정으로 용서하시고, 또 한 용서 청할 사람이 있다면 꼭 만나서 용서를 청하십시오. 그것이 남은 시간을 가장 소중하게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 형제님은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동안 집안 일로 원수처럼 지냈던 형제들을 만나 용서하였고, 오랫동안 용기가 없어서 용서를 청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 진정으로 용서를 청하고 용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의 교류 때문인지 베드로 형제님의 얼굴과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그 모습에 나는 감동과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맙다는 말을 주고 받으면서 꼭 안아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이 말씀은 잘못을 저지른 이웃, 죄를 지은 형제를 용서함에 있어서 한계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상대방의 잘못을 따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과거의 잘못을 들추지 않습니다. 진정한 용서와 화해는 조건이 없습니다. 따라서 서로가 진정으로 용서와 화해를 할 때 원래의 관계, 곧 ‘사랑의 관계’를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사랑의 관계’를 회복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진정한 용서는 나 자신의 뜻과 의지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말씀대로 용서하고자 하는 ‘의지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하느님께서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듯이, 우리도 상대방이 나에게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용서는 상대방의 잘못에 대한 단순한 너그러움이 아니라, 악에 굴복하지 않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내는 적극적인 신앙적 자세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은 이웃에 대한 용서와 화해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진정한 용서가 있는 곳에는 항상 생명과 기쁨, 행복이 존재하지만, 반대로 용서가 없는 곳에는 미움과 증오, 죽음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타인의 잘못에 대해 너그럽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내게 조금만 해를 끼쳐도, 조금만 손해를 입혀도 참지 못하고 윽박지르거나 응징하려 합니다. 심지어 받은 마음의 상처가 있으면 상대방에게는 몇 배로 되돌려 주려고 복수까지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응징과 복수의 정신을 사랑과 용서의 정신으로 바꾸고자 하십니다. 앙갚음이나 복수가 아닌 사랑과 용서를 베풀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근본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전제 되어 있습니다. 앙갚음이나 복수는 고스란히 자신에게 더 큰 상처와 고통이 되어 되돌아오지만, 하느님을 전적으로 믿고 사랑과 용서를 베푸는 사람에게는 평화와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앙갚음이냐 아니면 용서냐? 복수냐 아니면 사랑이냐? 선택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베드로 형제님처럼, 어쩌면 우리에게도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후회 없이 사랑하고 후회 없이 용서해야 하겠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글 _ 이창영 신부 (바오로, 대구대교구 대구가톨릭요양원 원장, 월간 꿈CUM 고문)
1991년 사제 수품. 이탈리아 로마 라테란대학교 대학원에서 윤리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교회의 사무국장과 매일신문사 사장, 가톨릭신문사 사장, 대구대교구 경산본당, 만촌1동본당 주임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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