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의 개종(카라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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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기획홍보분과 작성일23-10-02 20:28 조회72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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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 해설 [바오로의 개종((The Conversion of Saint Paul))]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 1601년. 캔버스에 유화, 230×175cm,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Santa Maria del Popolo) 성당의 체라시(Cerasi) 경당(로마)
미켈란젤로 작품이 후기 르네상스 작가주의 정신을 반영했다면 카라바조의 작품은 바로크 시대 화풍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데 카라바조(1571~1610, 이하 카라바조)는 17세기 회화에서 가장 많이 쓰인 ‘명암법’을 시작한 작가로 렘브란트와 루벤스, 벨라스케스 등에게 영향을 끼쳐 바로크 시대를 연 천재 화가다. 17세기 초 ‘로마의 새 미켈란젤로’인 카라바조는 교황 클레멘스 8세(재위 1592~ 1605년)의 재무장관인 티베리오 체라시 추기경 의뢰로 1600년 ‘성 바오로 사도의 개종’을 그렸다. 1600년 희년을 기념해 로마 산타 마리아 델 포롤로 성당 제단화로 ‘성 베드로 사도의 순교’ 작품과 함께 전시될 목적으로 그려진 이 그림은 50년 전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화와 달리 캔버스를 이용한 유화다.
먼저 상세하게 밑그림을 그리는 미켈란젤로와 달리 카라바조는 밑그림 없이 붓가는 대로 이 작품을 그렸다. 또 미켈란젤로가 비록 흐리게 채색했지만 색감을 화려하게 표현한 것과 달리 카라바조는 자신만의 독특한 명암법(테네브리즘 기법)을 이용한 단순한 구도로 바오로의 개종 사건을 표현했다. 카라바조는 많은 군중을 등장시킨 미켈란젤로의 작품과 달리 1601년에 완성한 작품에 땅 바닥에 엎어져있는 바오로와 말, 마부만을 등장시켰다. 카라바조는 명암법을 이용, 배경 전체를 어둡게 해 암흑 속에서 구원의 빛이 바오로에게 쏟아지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미켈란젤로 작품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따스한 빛이 말의 넓은 잔등과 바오로의 온 몸을 감싸고 있다. 바오로는 물론 그의 말과 마부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평온하기만 하다. 완성된 카라바조의 이 작품을 처음 본 산타 마리아 델 포롤로 본당 신부는 분개했다고 한다. 그는 “왜 말을 그림 중앙에 배치하고 그 밑에 사도 바오로를 그려 놓았느냐. 말이 하느님이냐”며 카라바조를 몰아세웠다. 이 말을 들은 카라바조는 “하느님은 빛 안에 계십니다”라고 답했다.
미술 평론가들은 카라바조의 고백처럼 “바오로의 개종은 지극히 내면적 사건이었기에 어둠을 뚫고 찾아오는 신비스런 한줄기 빛만 갖고도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면서 “카라바조의 천재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성 바오로 사도의 개종을 표현한 두 성화 작품에서 보았듯이 가톨릭교회가 성 바오로 사도의 개종 축일을 기념하는 이유는 바오로 사도의 개종이 갖는 구원사적 의미 때문이다. 바오로가 개종하게 된 것은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가 바오로에게 당신을 직접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 만남으로 바오로는 회개하게 됐고,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선포하게 된 것이다. 바오로도 자신의 개종에 대해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 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다”(갈라 1,15-16)고 고백했다.
[평화신문 2006.1.22 발행 (856호)]
성경, 문화와 영성 [바오로의 회심]
사도 바오로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예수님 사건 이후 탁월한 복음 선포자로 활동하였고 다양한 지역에서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바오로는 신약 성경이 형성된 역사에서도 특별한 역할을 하였다. 그가 집필한 여러 서간들은 초대 교회 안에서 권위 있는 문헌으로 인정되었고 마침내 신약 성경의 정경 목록 안에 포함되었다. 열심한 바리사이였던 바오로는 교회를 박해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극적으로 회심하게 되었다.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이 사건은 오랫동안 여러 미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카라바조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사도 바오로의 회심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며 묘사하고 있는가?
■ 바오로의 회심 사건
바오로는 벤야민 지파의 유다인으로서 지금의 터키에 있던 킬리키아 지방의 수도 타르수스에서 태어나 교육받고 성장하였다. “나 자신도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벤야민 지파 사람입니다.”(로마 11,1) “나는 유다 사람으로, 킬리키아의 저 유명한 도시 타르수스의 시민이오.”(사도 21,39) 바오로는 나자렛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열정적인 바리사이로서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다.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필리 3,5-6) “내가 한때 유다교에 있을 적에 나의 행실이 어떠하였는지 여러분은 이미 들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유다교를 신봉하는 일에서도 동족인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보다 앞서 있었고,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심이었습니다.”(갈라 1,13-14)
당시의 바오로에게 있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예수님은 “저주받은 몸”(갈라 3,13)이었다. 그래서 그런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메시아시라는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을 바오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변화하게 된 사건은 바오로 서간과 사도행전(사도 9,1-19; 22,6-16; 26,12-18)에서 서술된다. 바오로는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대사제에게 가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청하였다.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는 것이었다.”(사도 9,1-2)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3-5) 이와 같이 바오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것이다. 율법에 따라 죽임을 당한 예수님을 하느님이 다시 살리셨다는 사실은 바오로에게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사도가 된다.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으로 바오로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1코린 15,9-10)
■ 카라바조의 〈성 바오로의 회심〉
카라바조의 <성 바오로의 회심>(The Conversion of Saint Paul)은 1600-1601년 캔버스에 그린 유화로 230×175cm의 크기이며, 로마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Santa Maria del Popolo) 성당의 체라시(Cerasi) 경당에 소장되어 있다.
바오로의 회심을 주제로 한 카라바조의 첫 번째 작품은 이 성당에서 거절당하였다. 그래서 두 번째로 그린 것이 바로 이 <성 바오로의 회심>인 셈이다. 카라바조의 그림은 바오로의 회심을 그린 여러 화가들의 작품과 비교할 때 뚜렷한 특징을 드러내 보인다. 특히 카라바조의 작품은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년)의 <성 바오로의 회심>과 비교된다. 1542-1546년에 그려졌고 현재 바티칸의 바오로 경당에 소장되어 있는 프레스코화인 미켈란젤로의 이 작품은 웅장한 표현을 특징으로 한다. 하늘에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는 마치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처럼 빛을 내고 있고, 광활한 공간 안에 천사들과 많은 군중이 등장하여 시력을 잃은 바오로의 회심을 바라보고 있다. 물론 미켈란젤로의 그림과 카라바조의 작품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오로는 말에서 떨어지고 빛이 그의 얼굴을 비춘다는 점이다. 그런데 카라바조의 작품은 성경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해석하고 바오로의 회심을 공개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사건으로 묘사한다. 카라바조 그림의 배경은 어둠이고 밤이다. 그림의 화면 구성은 단순하다. 그림에는 말과 바오로 그리고 마부만이 등장한다. 그림의 중앙을 차지하는 말의 모습 아래에 바닥에 떨어진 바오로가 묘사되어 있다. 빛은 말 잔등을 거쳐 바오로를 비추고 있다. 이 명암법은 바오로 회심 사건의 의미를 잘 표현한다. 그림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둠 속에서 비추는 빛으로 바오로의 극적인 회심이 표현된다. 그 빛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부르시는 말씀이다. 그것은 요란한 사건이 아니라 한 인간 바오로에게 다가온 하느님 은총의 내적인 사건인 것이다. 이와 같이 카라바조는 대담한 화면 구성과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조를 통해 바오로 회심의 극적인 순간을 묘사한다.강렬한 빛에 시력을 잃은 바오로는 말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누워있다. 그에게 충격적인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의 두 눈은 감겨져 있고 그 누구도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 바오로의 고독과 침묵이 표현된다. 그런데 바오로는 두 팔을 하늘을 향해 내뻗고 있다. 이 몸짓으로 그는 놀라운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이 은총의 부르심에 자신을 내어맡기고 있다. 그의 복장이나 주변의 투구와 칼은 마치 로마 군인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다마스쿠스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바오로에게 일어난 은총의 체험으로 말미암아 그것들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바닥에 쓰러진 바오로는 위를 향하여 있지만, 화면의 오른쪽에 있는 마부는 아래를 향하고 있다. 그의 모습은 남루하다. 그는 바오로에게 일어난 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단지 말에만 관심이 있다. 그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하다. 바오로의 회심은 조용하고 고독한 사건이다. 바오로의 회심을 탁월하게 해석하고 표현한 카라바조의 이 그림에서 우리는 그의 천재성과 독창성이 잘 드러나는 하나의 걸작을 만나게 된다.
*송창현 미카엘 신부[월간빛, 2016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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