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분과 ~ 사순 특강 요약글 "돌봄" 이충희 사도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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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기획홍보분과 작성일23-04-07 19:30 조회70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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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
‘돌봄’이라는 주제로 서울대교구 임상사목 교육센터장 이충희 사도요한 신부님의 사순특강, 영적 돌봄에 대하여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신부님께서 일반병원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 원목 생활을 하면서 봉성체와 기도 외에는 달리 병자들에게 해줄 것이 없다는 무력감과 계속되는 원목 사목의 실패를 경험하면서 지쳐가고 있을 무렵, 목 아래로 몇 달째 전신마비로 음식을 먹지 못하던 환자에게 실수로 봉성체를 영해드리게 되었습니다, 노심초사하며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환자가 다음날 휠체어에 앉게 되고, 일주일 후 미사에 나오시고, 한 달 후에 퇴원하시게 되자 기적인지 의술의 혜택인지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지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나는 신부이고 신앙인인데... 기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가 ‘나에게 신앙이 없었구나! 신부였지만 냉담자였구나!’ 깨닫는 순간 이 사건은 신앙이 생기는 기적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왜 나에게 기적적인 사건을 보여주셨을까? 매일 성체를 모시고 갔지만 음식을 드시지 못해 성체를 영해드리지 못하고 기도만 드렸는데 예수님 당신이 그 형제님에게 가시고 싶으셨구나! 이 기적의 경험으로 ‘실수를 하는 것이 꼭 잘못된 것이 아니구나! 나쁜 것이 아니구나! 그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방식으로 새롭게 만들어가시는구나!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췌장암을 앓고 계신 40대의 자매님을 만났습니다. 점차 죽음에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감당하기 힘들었고 무서워서 병실에 가지 못할 정도였는데 자매님의 청으로 병자성사를 드렸습니다. 죽음을 준비하신다는 그분에게 힘이 될 수 있는 한 마디를 고민하다가 “먼저 가계세요. 나중에 따라갈게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말씀을 드린 이후 스스로 원목을 못 한다는 자괴감에 힘들었습니다. 일주일 후 자매님이 돌아가셨는데 마지막 힘든 순간에 신부님께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해달라는 이야기를 듣고,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전달될지는 사실 아무도 모르는구나!’ 하는 그 순간 치유되었고 이 치유체험으로 원목이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새로운 소명과 하느님의 부르심이기에 좀 더 위로하는 역할, 돌보고 전하고 나누는 것을 잘해야겠는 다짐과 함께 하느님에 대한 신앙도 새로워지고 성장했음을 진솔하게 고백하셨습니다.
신부님은 사람에 대하여, “상처받은 사람과 상처를 더 받은 사람으로 나눌 때 상처를 더 받은 사람은 위로를 더 많이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몸과 마음을 보살피며 관심을 가지고 도움을 주어 성장시키는 ‘돌봄’은 환자뿐만이 아니라 위기에 처해 누군가에게 토로하고 외치고 있다면 도움을 청하는 누구든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영적 돌봄에는 따뜻한 마음(연민)과 잘 들어주는 귀(경청)가 중요합니다. 성경에서는 연민을 어머니의 마음, 애끓는 느낌, 자비심, 따뜻한 마음으로 정의합니다. 마르코복음과 마태오복음 곳곳에 예수님의 돌봄, 돌봄이 필요한 자들에 대한 가엾은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연민을 갖기 위해서는 마음의 평정과 사람에 관한 신념이 기본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시는 예수님께서 “병든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2,13-17) 세리가 죄인이라 말에는 예수님께서 건강한 이와 병든 이로 고쳐주시고, 의문을 품은 바리사이에게도 공감하시며 기회를 주시는 예수님의 따뜻한 마음이 잘 드러납니다. 다음으로 공감적 경청이 필요합니다. 대화를 통하여 상대방의 감정을 들어주고, 그 뒤에 숨겨진 욕구를 찾고, 진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마음을 다하여 듣는 경청이야말로 돌봄의 핵심입니다. 좋은 경청의 태도는 눈 바라보기, 몸을 앞으로 기울여 듣기, 방해하지 않기, 함께 있어 주기, 공감·긍정·수용적 태도로 듣기, 고개를 끄덕이며 손잡아주기입니다. 마르코복음에는 치유하시는 예수님과 만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용기를 준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적적인 사건은 한 번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과 돌봄이 있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관심, 도움, 보살핌, 성장의 관점에서 모든 일은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전인적이고 구체적 치유, 죄의 용서와 구원,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치유와 용서를 받았고 자책에서 벗어나 새롭게 태어나도록 이미 그 전에 예수님이 괜찮다는 말씀해주셨음을 깨닫고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면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돌봄의 깊이는 시간이 지나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돌봄도 예수님과 같아야 합니다. 먼저 용서해주고, 그 용서를 통하여 그들이 새로워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돌봄의 깊이를 배운 제자들은 예수님을 뵙지 못한 토마스의 소외된 마음을 살피고, 토마스와 제자들이 함께할 때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최초의 공동체는 예수님의 돌봄을 이어온 공동체였으며 그 공동체 안에 우리가 속해있습니다. ‘돌봄’이란 따뜻한 마음과 잘 들어주려는 노력이 있으면 누군가 바뀌는 시간을 함께할 수 있으며 기적적인 것들이 그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실수도 실수로 끝나지 않고 하느님의 힘을 통해서 새로워지고 기적적이고 의미 있는 사건이 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우리 공동체 안에서 일어났던 일들이고 그것을 계속해가는 것이 영적 돌봄을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돌보는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서 더 많이 드러날 수 있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까지 돌보려고 했던 사람들에 대한 사랑, 연민, 따뜻함을 우리가 좀 더 많이 느껴보고, 누군가에게 그 따뜻함을 주는 것임을 생각해 봅니다.
정리: 박현정 데레사 | 교육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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